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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의 꿈
    해외생활이야기 2019. 2. 21. 08:54

    조용필.

    엄마는 여느 아주머니들 처럼 조용필을 참 좋아하신다. 기억은 안나지만, 집에서 얼마나 자주 조용필노래가 흘러 나왔으면 내가 말도 잘 못할때 이미 조용필의 고추잠자리라는 노래를 곧잘 따라 불렀을까. 아버지가 녹음해 놓으신 카세트 테이프에는 아직도 나의 방정맞은 노랫소리가 담겨있다.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봐 그런가봐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기다리지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보고 싶지



    내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아나기 시작할 무렵, 아버지께서 전축앞에 앉으셔서 그때의 녹음 테이프들을 하나둘 재생 하실때면, 창피하고 민망해서 투덜대며 쪼르르 내방으로 도망가곤 했다.


    용필오빠 한번 만나보면 소원이 없겠네~


    엄마는 용필 아저씨의 열열한 팬이셨다. 기도하는! 하면 꺄악! 하시던게 바로 우리 엄마다. 엄마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가수지만 사실 나는 관심도 없었고,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노래를 그렇게 좋아하시고 듣고싶으셔도 조용필 테이프나 씨디도 하나 없으셔서, 그냥 라디에오서 흘러나올때 듣는거로 만족하시던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내가 생각없이 놀고, 부모님한테 서운해하고, 용돈을 헛된데 쓸때, 엄마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 한장 사지 못하시고 그렇게 가족을 위해 절약 하시며 살으셨다.

    대학을 휴학하고 정식으로 일해서 받은 첫 월급은 내 옷, 당구장, 피씨방, 술값으로 펑펑 썼다. 그 흔한 빨간 내복도, 그렇게 좋아하시는 조용필 음반 한장도 사드리지 못했다. 만원짜리 한두장이면 되는 거였는데. 그렇게 쉬운거였는데, 그때의 나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쉬운거라는 것 조차.

    스무살 중반이 넘어갈 무렵, 나는 인생에 대한 여러가지 진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 수록 자식으로써의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한동안 부모님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던 적이 있다. 평생을 장님으로 살다가 갑자기 눈을 뜬 것 처럼, 부모님이 나를 위해 희생하신 모든것들과 생각없이 받기만 했던 기억들이 머릭속으로 쏟아져 들어와, 견딜수 없이 죄송스럽고 괴로웠다. 육체적으로는 성인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자기밖에 모르는 어린애 수준이었던 나. 껍질을 깨고 나왔을 때의 격한 쓰라림 이후, 나는 많이 성장했다.

    표현이 서툰 내가, 소극적으로 나마 엄마에게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애용한 방법은 "조용필" 이었다. 조용필 노래 모음집을 만들어 드린다거나, 조용필이 나온 티비 방송을 다운받아서 보여드리거나 하는 일이었다. 조용필 콘서트를 보내드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게 못내 아쉬웠는데, 영국에 온 후 뒤늦게나마 조용필 콘서트 티켓을 좋은 자리로 예매하여 보내드렸다. 정말 별것 아닌 종이 쪼가리 두장에, 부모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던것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풍운의 꿈을 안고 온 머나먼 타국에서 하루 하루 외로움, 낮설음과 씨름하며 살다가, 하드디스크에서 예전에 엄마에게 보여드렸던 조용필 콘서트 동영상을 우연히 발견했다. 무심코 재생한 동영상은 '꿈' 이라는 노래로 시작했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곳
    여기저기 헤메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


    어른들만의 노래라고 생각했던 조용필의 '꿈'은, 놀랍게도 어느새 나의 삶 나의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지친날에 받은 갑작스런 위로에, 고구마를 먹은것 같이 목이 메였다. 그 옜날 젊고 아름답고 꿈많으시던 엄마는, 고향을 떠나 정착한 낮선 도시 서울에서 이 노래를 들으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이 노래가 나의 마음을 울린 것처럼, 그옛날 엄마의 마음도 울렸을까. 엄마는 꿈을 이루셨을까.


    꿈을 찾아 떠나온 머나먼 곳에서, 그시절의 엄마가 되어 고향의 향기를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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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제가 스팀잇에 적었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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